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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A Small Rosetta Stone of My Own}
\author{Joon Hwan (Justin) Hong}
\date{May 22, 2026}
\begin{document} \maketitle
Essay · § 1.1 · on language
A Small Rosetta Stone of My Own
On Korean, English, French, and the indignity of being answered in English.
Joon Hwan (Justin) Hong
Written between three languages, Montréal
May 22, 2026
Abstract
There is a famous stone in the British Museum with the same decree written three
ways: hieroglyphic, demotic, and Greek. A serious object, in other words. Mine is
less serious, less durable, and considerably more likely to misgender a noun. Still,
I have begun to think of my language life as a small, badly chipped Rosetta Stone
of its own — Korean, English, and now French. What follows is the same essay
in all three, written first in English and then translated, imperfectly, by the
author.
There is a famous stone in the British Museum with the same decree written three ways:
hieroglyphic, demotic, and Greek. A serious object, in other words. Mine is less serious,
less durable, and considerably more likely to misgender a noun.
Still, I have begun to think of my language life as a small, badly chipped Rosetta Stone
of its own: Korean, English, and now French, the last of which remains less an inscription
than a set of hopeful scratches made under classroom lighting.
These are some wandering thoughts from a French learner.
One of the unexpected consequences of meeting ma blonde is that I began taking
French classes at McGill University through Continuing Studies. Free, in my case, through
the great grace of McGill: that ever-benevolent institution whose graduate stipends are so
lavish, so princely, so obscene in their abundance, that modern techno-feudal CEO overlords
must surely look upon us and tremble with envy.
I had encountered French before, of course. In high school in Ontario, I begrudgingly
apprenais le français, in the same spirit one might learn the names of
medieval farming implements: examinable, vaguely historical, and unlikely to be used at
dinner. Later came Duolingo, with its green owl and its quiet threats. Then came an actual
class, with an actual teacher, actual structure, and actual people engaged in the same
collective struggle against verbs that change shape when observed.
This helped.
Motivation helped more.
My reasons are partly social, partly romantic, and partly self-preservational. I would
prefer not to become mute at house parties full of Québécois people who
prefer French, especially after alcohol has begun performing its ancient and holy duty of
making everyone speak faster. More seriously, I want to speak, however imperfectly, in the
preferred language of my girlfriend’s family — particularly when they are
feeding me wonderful French and Italian dinners, which is a situation in which linguistic
gratitude should aspire to more than nodding, smiling, and saying merci with the
moral force of a tourist.
And the annoying thing is that practice works.
I am improving. Slowly. Unevenly. In the manner of a person carrying a full bowl of soup
across a room while being examined.
Has my confidence improved accordingly?
Non.
De temps en temps, j’essaie. J’ouvre la bouche pour parler, mais hélas,
la réponse me revient… en anglais. D’autres fois, lorsque je regarde le
menu d’un restaurant, les mots semblent écrits dans une magie noire.
This is one of the great humiliations of learning French in Montréal. You attempt
the language. You arrange your small sentence. You send it into the world, slightly
underfed but alive. Then the person across from you, merciful and cruel in equal measure,
replies in English.
This is kindness, probably.
It feels like a verdict.
Still, I try. I try to think in French. I try to search for the equivalent word before
surrendering to English. I try to write in French. I listen to CBC French videos, where
the speech is clear enough to invite hope and fast enough to punish arrogance. I try,
inadvisably, to reason through the language.
This is often where I go wrong.
Languages are not machines assembled for my convenience. They do not owe me symmetry.
Korean has its oddities. English has its oddities. French has many oddities, some of which
appear to have tenure. The difference is only that Korean and English have lived in my
head long enough to make their absurdities feel like furniture. French is newer, so every
irregularity still has the insolence of an intruder.
I also feel a small jealousy toward people who already know a Romance language. If you
know Spanish, Italian, Portuguese, or Romanian, French seems to meet you halfway, or at
least wave from across a well-lit bridge. English, meanwhile, likes to cosplay as French
in its vocabulary, borrowing elegant words and wearing them badly. The grammar does not
follow. The usage does not follow. English took some of the furniture, then rebuilt the
house with Germanic plumbing.
And Korean — my other native language — sits half a world away, grammatically
and lexically removed from both. A beautiful starting position, truly. A linguistic gym
membership with ankle weights attached.
But I would not trade it.
I love that I speak Korean. I love the compactness of it, the social texture of it, the
way tone, hierarchy, affection, irritation, and intimacy can live inside endings that
English would need several extra sentences to explain. I love that it lets me bring
friends to Korea and do more than translate nouns. I can translate a menu, a street sign,
a family custom, a small rule of behaviour, a joke that would otherwise die politely in
subtitles.
There is privilege in that. Not the glamorous kind, perhaps, but the useful kind. The
kind that lets one open a door for someone else.
Perhaps this is what I find most compelling about learning French now. It is not merely
vocabulary, grammar, or the slow domestication of vowel sounds. It is access. It is the
gradual movement from standing outside a room to knowing where the door is, then how to
knock, then how to apologize properly once inside.
So I find myself with three languages: one inherited, one grown into, one still under
construction.
Korean is the family house.
English is the office, the lab, the article, the argument.
French is the neighbourhood I keep walking through, trying to stop looking like a visitor.
Not hieroglyphic, demotic, and Greek. Not the key to an ancient civilization. Not even,
most days, the key to ordering confidently at a restaurant.
But a small Rosetta Stone all the same.
Chipped, incomplete, and improving.
J’essaie.
— § —
요즘 나는 내 언어 생활을 작은 로제타 스톤처럼 생각하곤 한다. 물론 박물관 유리장 안에 들어갈 만한 거창한 건은 아니다.
고대 문명을 해독할 열쇠도 아니고, 박물관에서 사람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물건도 아니다. 그저 한국어, 영어,
그리고 아직은 군데군데 금이 간 프랑스어가 나란히 놓여 있는, 아주 개인적이고 조금 우스운 돌조각에 가깝다.
한국어와 영어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가지고 자랐다. 하나는 가족의 언어였고, 하나는 학교와 논문과 연구의 언어가 되었다.
한국어는 밥상, 가족, 농담, 정,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사회적 결을 담고 있다. 영어는 생각을 정리하고, 주장하고,
논문을 쓰고, 나 자신을 지나치게 길게 해명하는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어가 있다.
프랑스어는 아직 집이라기보다는 동네에 가깝다. 자주 걸어 다니지만 아직 길을 완전히 모르는 동네. 어느 골목에서는
조금 자신 있게 걷다가도, 갑자기 메뉴판 하나 앞에서 길을 잃는 동네. 언젠가는 방문객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여전히 지도와 표지판과 약간의 허세를 함께 들고 다니는 그런 곳이다.
놀랍게도, 이 동네에 들어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ma blonde”였다.
ma blonde를 만나고 나서 생긴 예상 밖의 즐거움 중 하나는 내가 McGill Continuing Studies를 통해 프랑스어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무료였고, 이는 McGill이라는 대단히 자비로운 기관의 은총 덕분이다. 물론
McGill 대학원생의 생활비가 워낙 풍족하여, 현대 테크노-봉건제 CEO 군주들이 질투할 정도라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예전에도 프랑스어를 배운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온타리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apprendais le
français” 하고 있었다. 배우고는 있었지만, 살고 있지는 않았다. 시험을 위해 외우고, 수업을 버티고,
동사 변화표를 바라보며 인생의 의미를 잠시 잃는 정도였다.
그때의 프랑스어는 언어라기보다는 과목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견뎌야 하는 과목이었다.
나중에는 Duolingo도 했다. 초록 부엉이가 매일 나를 감시했고, 나는 그 감시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실제 수업은
달랐다. 교사가 있고, 구조가 있고, 나처럼 같은 동사를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은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혼자
틀리는 것보다 같이 틀리는 것이 훨씬 인간적이다.
무엇보다 동기가 생겼다.
동기는, 놀랍게도, 도움이 된다.
나의 이유가 모두 고상한 것은 아니다. 하나는 생존이다. 퀘벡 사람들로 가득한 하우스 파티에서, 모두가 프랑스어를
선호하고, 술이라는 위대한 사회적 촉매가 사람들의 말 속도를 점점 빠르게 만들 때, 나는 완전히 벙어리가 되고 싶지 않다.
다른 이유는 조금 더 진지하다. 여자친구의 가족이 선호하는 언어로, 적어도 조금은 말하고 싶다. 특히 그분들이 집에서
멋진 음식을 차려 주실 때는 더욱.
문제는 연습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느리게, 삐걱거리며, 가끔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돌아가면서.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어 말하기에 대한 자신감도 같이 늘었는가?
“non”.
De temps en temps, j’essaie, j’ouvre la bouche pour parler, mais hélas,
j’entends la réponse… en anglais. Dans un autre cas, souvent, lorsque
je regarde le menu des restaurants, c’est écrit en mots magiques, comme la
magie noire.
이 문장은 내가 프랑스어를 배울 때 느끼는 굴욕을 꽤 정확하게 담고 있다.
가끔 나는 시도한다. 문장을 머릿속에서 조립한다. 관사와 성별과 동사 시제를 어떻게든 붙잡아 본다. 그리고 입을 연다.
아주 작은 프랑스어 문장이 세상으로 나간다. 그러면 상대방은 친절하게, 정말로 친절하게, 영어로 대답한다.
아마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약간 판결처럼 들린다.
메뉴판도 비슷하다. 영어 메뉴판이나 한국어 메뉴판에서는 그냥 음식 이름이 보인다. 프랑스어 메뉴판에서는 가끔 마법진이
보인다. 어떤 단어는 알 것 같다. 어떤 단어는 모르는 게 분명하다. 어떤 단어는 아는 것 같아서 더 위험하다.
그래도 나는 시도한다.
프랑스어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국어나 영어에서 바로 튀어나오는 단어를 잠시 붙잡고, 프랑스어에서는 무엇일지 찾아본다.
프랑스어로 문장을 써 본다. CBC 프랑스어 영상을 듣는다. 알아듣기 충분히 명확한 것 같다가도, 갑자기 자만심을 벌주듯
속도가 빨라진다.
그리고 나는 언어를 “reason” 하려고 한다.
이것은 자주 잘못된 선택이다.
언어는 항상 논리적이지 않다. 한국어도 이상한 점이 많다. 영어도 이상한 점이 많다. 프랑스어도 이상한 점이 많다. 다만
한국어와 영어의 이상함은 오래 같이 살아서 이제는 가구처럼 느껴질 뿐이다. 프랑스어의 이상함은 아직 낯설어서, 집에
들어온 손님처럼 자꾸 눈에 띈다.
나는 특히 Romance language를 이미 아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한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같은 언어를 아는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만날 때 이미 다리의 절반쯤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영어는 어휘 면에서 프랑스어 흉내를 꽤
낸다. 우아한 단어를 많이 빌려 왔다. 하지만 문법은 따라오지 않는다. 사용 방식도 자주 다르다. 영어는 프랑스어의 가구
몇 개를 가져와 놓고, 집의 배관은 게르만식으로 다시 만든 것 같다.
그리고 한국어는 반대편 행성쯤에 있다.
문법도 다르고, 어휘도 다르고, 문장이 움직이는 방식도 다르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한 출발점으로는 참으로 아름답다.
말하자면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언어 헬스장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간결하면서도 복잡하고, 사회적 거리와 친밀감과 짜증과 애정이 어미
하나에 들어갈 때가 있다. 영어로는 여러 문장이 필요한 것을 한국어는 말끝에서 처리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한국어는 나에게 남을 한국으로 데려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친구들을 한국에 데려가면 나는 단순히 단어를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다. 메뉴를 설명하고, 길거리 간판을 읽어 주고, 가족 문화와 음식과 역사와 작은 예절들을 풀어 준다. 자막으로는
죽어 버릴 농담을 살릴 수도 있다. 외국인에게는 비싼 여행지가 된 한국을, 나에게는 조금 더 안쪽에서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아마 언어가 주는 가장 큰 기쁨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단어가 아니라 접근권.
방 밖에 서 있다가, 문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되는 것. 문을 두드리는 법을 배우는 것. 안에 들어갔을 때 제대로 사과하는 법까지 조금씩 익히는 것.
그래서 지금의 나는 세 언어 사이에 있다.
한국어는 가족의 집이다.
영어는 연구실, 논문, 주장, 설명의 공간이다.
프랑스어는 내가 계속 걸어 다니며 길을 익히는 동네다.
나에게는 나름의 작은 로제타 스톤이다.
물려받은 면 하나.
살면서 자라난 면 하나.
그리고 아직도 발굴 중인 면 하나.
프랑스어 쪽은 아직 많이 깨져 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시도한다.
J’essaie.
— § —
Je pense parfois à ma vie avec les langues comme à une petite pierre de Rosette personnelle.
Ce n’est pas une vraie pierre, bien sûr. Elle n’est pas dans un musée.
Elle ne va pas aider quelqu’un à comprendre une civilisation ancienne. Elle est
beaucoup moins noble, et beaucoup plus susceptible de faire une erreur avec le genre
d’un nom.
Mais dans ma tête, il y a trois côtés : le coréen,
l’anglais, et maintenant le français. Le coréen est une langue de
famille. L’anglais est une langue d’école, de recherche,
d’articles, d’arguments, et parfois d’explications beaucoup trop longues.
Le français, pour l’instant, est une langue que j’apprends encore
à habiter.
Une des surprises de rencontrer ma blonde, c’est que j’ai commencé
à prendre des cours de français à McGill, avec Continuing Studies. Pour
moi, ces cours ont été gratuits, grâce à la grande
générosité de McGill. Une générosité si grande,
avec une bourse d’étudiant gradué si magnifique, que les grands
seigneurs techno-féodaux de la Silicon Valley seraient sûrement jaloux.
J’avais déjà étudié le français avant. Au
secondaire, en Ontario, j’“apprendais le français”.
Techniquement.
Mais à ce moment-là, le français était surtout une matière
scolaire. Quelque chose à survivre. Quelque chose avec des verbes, des tests, des
petits dialogues artificiels, et une impression générale que cette langue
existait principalement pour me faire perdre des points.
Plus tard, il y a eu Duolingo. Le hibou vert. Le petit rappel. La culpabilité.
Mais un vrai cours, avec un professeur, une structure, et d’autres personnes qui
essaient aussi de ne pas détruire les mêmes conjugaisons, c’est
différent. On se sent moins seul dans l’erreur. L’erreur devient
presque communautaire. Presque chaleureuse.
Et puis, j’avais une motivation.
Cela aide beaucoup, apparemment.
Mes raisons ne sont pas toutes nobles. Il y a une raison sociale : je ne veux pas
devenir complètement muet dans des fêtes où tout le monde parle
français, surtout quand l’alcool commence son travail ancien et sacré,
c’est-à-dire faire parler les Québécois de plus en plus vite.
Il y a aussi une raison plus sérieuse. Je veux pouvoir parler, au moins un peu, dans
la langue préférée de la famille de ma blonde. Surtout quand sa famille
me donne de très bons soupers français et italiens. Dans ces moments-là,
la gratitude devrait pouvoir faire plus que sourire, hocher la tête, et dire
merci avec l’énergie morale d’un touriste.
Et, chose étrange, je m’améliore.
Lentement. Pas toujours élégamment. Mais je m’améliore.
Est-ce que ma confiance s’améliore aussi ?
“non”.
De temps en temps, j’essaie, j’ouvre la bouche pour parler, mais hélas,
j’entends la réponse… en anglais. Dans un autre cas, souvent, lorsque
je regarde le menu des restaurants, c’est écrit en mots magiques, comme la
magie noire.
Cette phrase n’est peut-être pas parfaite. Mais elle est vraie.
Parfois, j’essaie. Je prépare ma petite phrase. Je pense au verbe, au temps,
au genre, à la préposition, à tout ce petit théâtre
grammatical. Puis j’ouvre la bouche.
Et la personne me répond en anglais.
C’est probablement gentil.
Mais dans mon cœur, c’est un petit jugement.
Les menus sont une autre affaire. Quelquefois, je regarde un menu en français et je
reconnais des mots. Quelquefois, je pense que je reconnais des mots, ce qui est plus
dangereux. Et quelquefois, les mots ressemblent à une forme de magie noire. Je sais
qu’il y aura de la nourriture à la fin, mais le chemin pour y arriver n’est
pas toujours clair.
Quand même, j’essaie.
J’essaie de penser en français. J’essaie de chercher le mot français
avant de tomber dans l’anglais. J’essaie d’écrire en français.
J’écoute des vidéos de Radio-Canada sur YouTube. Au début, je
comprends assez bien. Puis quelqu’un commence à parler un peu plus vite, et
mon courage quitte la pièce.
J’essaie aussi de “reason” la langue.
Ce n’est pas toujours une bonne idée.
Une langue n’est pas toujours logique. Le coréen a ses bizarreries.
L’anglais a ses bizarreries. Le français a beaucoup de bizarreries. La
différence, c’est que les bizarreries du coréen et de l’anglais
vivent dans ma tête depuis longtemps. Elles sont devenues des meubles. Les bizarreries
du français sont plus récentes, donc elles ont encore l’air
d’invités étranges dans la maison.
J’ai aussi une petite jalousie envers les gens qui connaissent déjà une
langue latine. Si quelqu’un parle espagnol, italien, portugais, ou roumain, le
français semble l’attendre à mi-chemin. Il y a déjà des
ressemblances. Des ponts. Des mots familiers.
L’anglais, lui, aime faire semblant d’être français avec son
vocabulaire. Il porte des mots français comme un costume élégant, mais
la grammaire ne suit pas toujours. L’anglais a pris quelques meubles français,
puis il a reconstruit la maison avec une plomberie germanique.
Et le coréen, mon autre langue maternelle, est beaucoup plus loin.
La grammaire est différente. Le vocabulaire est différent. La manière
de construire une phrase est différente. Pour apprendre le français,
c’est une base magnifique, vraiment. Un peu comme aller au gymnase linguistique avec
des poids attachés aux chevilles.
Mais je ne voudrais pas perdre le coréen.
J’aime parler coréen. C’est une belle langue. Elle peut être
directe, douce, sociale, hiérarchique, drôle, affectueuse, et très
précise avec très peu de mots. Parfois, une terminaison en coréen fait
le travail de plusieurs phrases en anglais.
Et le coréen me donne aussi une porte vers la Corée que je peux ouvrir pour
d’autres personnes. Quand j’amène des amis en Corée, je peux
traduire plus que des mots. Je peux expliquer un menu, une coutume, une petite règle
sociale, une blague, une annonce dans le métro, un plat, une rue, une manière
de faire. Je peux montrer un pays que j’aime autrement qu’avec des sous-titres.
C’est un privilège discret, mais réel.
Peut-être que c’est cela, le vrai plaisir d’apprendre une langue. Ce
n’est pas seulement le vocabulaire. Ce n’est pas seulement la grammaire.
C’est l’accès.
C’est la différence entre rester devant une porte et apprendre, lentement,
où se trouve la poignée.
Alors maintenant, j’ai trois langues.
Le coréen est la maison familiale.
L’anglais est le bureau, le laboratoire, l’article, l’argument.
Le français est le quartier que j’apprends encore à traverser.
Ce n’est pas hiéroglyphique, démotique, et grec. Ce n’est pas la
clé d’une civilisation ancienne. Ce n’est même pas, certains jours,
la clé pour commander avec confiance dans un restaurant.
Mais c’est quand même une petite pierre de Rosette.
Un côté hérité.
Un côté construit avec le temps.
Un côté encore en excavation.
La partie française est encore cassée par endroits.